한민족 성산은 백두산/흉노족 성산 기련산

15.12.26조회 228




한민족 성산인 백두산을 지나국에 팔아 넘긴 김일성은


한반도에 유입된 소수 흉노족의 후손으로 흉노족의 성산은


광개토태왕이 평정했던 평량으로 감숙성 지역의 기련산이다!

흉노족 김일성 일가의 선조가 살았던 고향-감숙성 기련산 지역



長白山(장백산)은 白頭山(백두산)에서 나왔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지리전고(地理典故)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이것이 곧 《산해경(山海經)》에 이른바 불함산(不咸山)이다. 이 곳(불함산=백두산)으로부터 동쪽으로 뻗쳐서 장백산되고, 한 줄기는 북쪽으로 달려 경성ㆍ부령(富寧)을 지나 두만강을 끼고 동쪽으로 뻗어 경흥에서 그친다." 

약천집(藥泉集)제28권기(記)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우리 국가가 나라를 세우고 영토를 개척해서 나누어 팔로(八路)를 만들었는데, 이 관북(關北) 지방이 가장 멀고 궁벽하며 또 지세는 백두산이 남쪽으로 뻗어 오고 장백산(長白山)이 북쪽으로 꺾여 나가 오랑캐 땅과 국경이 맞닿은 것이 거의 2천 리나 됩니다."

 

 

 

북만주 장백산의 만주족은 뿌리산을  동방의 태백산인

 

한반도지역의 백두산으로 삼고 모두 장백산이라고 기록하였다!

 

그것은 환웅천왕이 해땅국을 열었던 백두산이 뿌리산이라는

 

해민족 성산의 이미지와 함께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고향이

 

환인 천왕이 파나루국을 열었던 북만주 지역임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인.환웅족이 하나로 이어진 장백산과

 

백두산은 하나의 줄기로 이어진 산으로 이해한 것이다!



 

 

[자료]장백산과 백두산은 백산(白山), 태백산(太白山) 등의 이름과 함께 옛날부터 중국과 한국(조선) 양쪽에서 모두 혼용되어 왔다. 또한 현재 중국정부는 중국에서 장백산이란 명칭만을 쓰도록 규정하고 있지도 않다. 현재 중국에서 장백산은 주로 장백산맥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쓰이고 있고, 天池가 있는 장백산맥의 주봉을 가리킬 때는 白頭山이란 이름을 쓰기도 한다. 조선숙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胡人(만주족)도 장백산을 백두산이라고 칭했다. 그 만주족이 어느 지역에 거주하는 자들인지, 그들이 백두산이라고 발음했는지 아니면 흰 머리 산이라는 의미의 만주어로 샹기얀 우주 이 알린이라고 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장백산이란 이름을 중국인만이 아니라 조선에서도 쓴 것처럼 백두산이란 명칭도 조선의 전유물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중국의 문헌에서 장백산이란 이름이 처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대략 12세기에 여진족이 세운 국가인 금나라 때이다. 그런데 그 시기에는 장백산보다 백산(白山)이란 이름이 더 일반적으로 쓰인 것 같다. 금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금사에서는 여진족의 전통적인 강역을 黑水白山이라고 부르고 있다. 즉 흑수백산은 북쪽으로 흑룡강과 남쪽으로 장백산(백두산)의 사이 지역을 여진족의 전통적인 생활 영역으로 인식한 데서 나온 표현이다. 훗날 16-17세기 만주족은 장백산을 만주문자로 골민 샹기얀 알린’(golmin šanggiyan alin)이라고 기록했다. 이는 길고 흰 산이라는 의미로서 장백산과 의미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이름이다. 장백산이라는 한어 이름이 먼저 생겼는지, 아니면 골민 샹기얀 알린이라는 여진어 이름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곳이 여진인의 전통적인 강역이었던 측면에서 보면 장백산은 여진어인 골민 샹기얀 알린을 의역한 한어 이름인 것으로 추정된다. 장백산은 만주지역 남부에서 최고봉의 산이고, 광대한 산무리의 곳곳에 화산의 기기절묘한 경관을 가지고 있으며, 정상의 칼데라호인 천지는 장엄하다. 그렇기 때문에 장백산은 그 일대를 터전으로 살아온 민족들에게 언제나 특별하고 신령스러운 산이었다. 이들은 장백산 자체를 으로 여겼다. 12세기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1172년에 장백산을 흥국영흥왕(興國靈應王)에 책봉하고 1193년에는 개천굉성제(開天宏聖帝)로 책봉하여 숭상했다. 그 이전에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도, 자신들의 발상지가 장백산에서 멀리 떨어진 시라무렌강 유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백산을 백의관음(白衣觀音)이 거주하는 곳이라며 숭상했다.
 
   17세기 초 후금()을 세운 만주족에게는 장백산이 거란이나 그들의 조상인 여진족보다 더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왜냐하면 만주족은 황실인 아이신 기오로씨의 조상이자 자신들의 전설상의 시조인 부쿠리 용숀의 탄생지를 장백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1677(강희16)에 조상의 발상지를 답사한다는 명목으로 청조 최초의 장백산 탐사가 시행되었고, 그 다음 해에 청조는 장백산을 長白山神(golmin šanyan alin i enduri)에 봉하고 매년 두 번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부쿠리 용숀의 발상지와 장백산은 처음에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별개의 장소였다. 이번 호에서는 청조의 만주족 통치자들이 그들의 시조라고 주장된 부쿠리 용숀과 장백산을 어떤 방식으로 연결해 갔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다시 말해 만주족이 그들의 먼 과거의 전설적 조상과 신화와 역사를 장백산이라는 탁월한 랜드마크에 연결해감으로써, 지리적 표상을 자신들의 왕조와 황실의 정통성을 빛내는 수단으로 활용한 방식에 대해 설명하려고 한다.
 
   청 황실 아이신 기오로씨의 시조인 부쿠리 용숀의 출생에 대해, 청대에 편찬된 모든 관찬 사서는 그가 장백산 동쪽에 있는 부쿠리 산의 불후리 호수에서 하늘의 세 선녀 가운데 막내인 퍼쿨런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太祖高皇帝實錄(1686.강희25)은 그 첫머리에서 先世는 장백산에서 發祥했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래서 청대에 만주족들은 부쿠리 산이 장백산의 山群 가운데 하나이고 불후리 호수는 백두산의 천지라고 생각했다. 또한 장백산은 만주족 황실의 조상의 발상지이자 모든 만주족의 발상지라고 믿어졌고 숭상되었다. 그러나 장백산과 부쿠리 산은 한반도의 남북 거리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전혀 무관한 곳이었다. 불후리 호수도 백두산의 천지와는 전혀 무관한 호수였다. 또한 부쿠리 용숀과 장백산이 청조(후금)가 설립된 누르하치 시기나 그 이전부터 아이신 기오로씨의 시조와 그 발상지로 숭배된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청 초기에 편찬된 太祖武皇帝實錄太祖高皇帝實錄에 더해 지난 수십년 사이에 그 존재가 알려진 만문 기록물인 舊滿洲檔 天聰九年겅기연 한의 훌륭히 행한 규범(Nenehe genggiyen han i sain yabuha kooli)의 관련기록들을 비교하면, 청 황실의 시조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과정에 장백산이 유입되어간 궤적을 시계열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
 
  『舊滿洲檔 天聰九年의 기록에 의하면, 흑룡강 유역의 후르카에 출병했던 후금의 군대가 天聪 9(1635) 56일 심양으로 귀환했을 때, 그 정벌전에서 후금군에 투항하여 함께 온 묵시커(Muksike)라는 후르카인은 아래와 같이 말했다.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대대로 부쿠리 아래 불후리 호수에서 살았습니다. 우리 지방에는 글과 문서가 없고 옛날에 살았던 것을 차례대로 말하여 전해온 것,[에 의하면] 그 불후리 호수에 하늘의 세 처녀 엉굴런, 정굴런, 퍼쿨런이 목욕하러 왔는데, 까치가 준 붉은 과일을 막내 처녀 퍼쿨런이 얻어 입에 머금자 목구멍으로 들어가서 임신하여 부쿠리 용숀을 낳았습니다. 그 일족이 만주 國人입니다. 그 불후리 호수의 둘레는 100 , 사할리얀 울라[흑룡강]로부터 120-130 입니다. 나에게 두 아들이 태어난 후, 그 불후리 호수로부터 이주하여 가서 사할리얀 울라[흑룡강]의 나르훈이라는 곳에서 살았었습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부쿠리 용숀이 태어났다는 부쿠리 산 아래 불후리 호수는 흑룡강 인근이었고, 세 선녀와 부쿠리 용숀 탄생 신화는 그 일대에 사는 후르카인에게 대대로 구전되어 온 전설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天聪 9(1635)에 후르카 사람인 묵시커에 의해 후금()에 소개된 것이었다. <皇輿全覽圖>(강희56)를 참조하면 묵시커 일족이 대대로 살았다는 부쿠리 과 불후리 호수의 정확한 위치를 점찍을 수 있다. 이 지도에는 흑룡강 서안의 청대 黑龍江城(sahaliyan ula i hoton. 현재 중국의 黑河市) 남쪽에 ‘bukūri alin’(부쿠리 )이 명기되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흑룡강을 건너서 더 동쪽으로 진입한 곳, 즉 현재 러시아의 블라고베셴스크(Благовещенск) 인근에 ‘bulhūri omo’(불후리 호수)가 표기되어 있다. 부쿠리 에서 장백산까지의 거리는 대략 1천여 km로서, 한반도 남단에서 북단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아래 두 장의 지도를 보자. 전자는 장백산과 부쿠리 산의 위치를 표기한 것이고, 후자는 <황여전람도>(강희56)에 표기된 청대 黑龍江城 인근의 부쿠리 산 일대를 발췌한 것이다
 

 
바탕지도는 <皇輿全覽圖>(강희56)(汪前進· 劉若芳 整理, 淸廷三大實測全圖集, 北京 : 外文出版社, 2007)第二排二號. 불후리 호수와 부쿠리 산의 사이에 흑룡강(sahaliyan ula)이 흐르고 있다.
 
 
   묵시커가 말한 부쿠리 용숀 시조 설화는 이후의 문헌에서 내용이 점차 상세해져갔다. 부쿠리 용숀이 청 황실의 조상 계보에 유입된 것을 보여주는 최초의 기록은 홍타이지 재위기 천총 연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겅기연 한의 훌륭히 행한 규범이다. 이 기록에서 부쿠리 용숀의 행적은 묵시커의 보고 내용보다 매우 상세하게 확장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부쿠리 용숀은 불후리 호수에서 목욕하던 세 선녀의 막내 퍼쿨런의 아들로 태어나서, 그곳을 떠나 일란 할라(ilan hala. 三姓. 현재 중국 黑龍江省 依蘭縣) 지역으로 이동했고, 그곳의 사람들에게 추대를 받아 어전(ejen. 主人)이 되었다. 신화의 인물 부쿠리 용숀이 일란 할라로 이동한 것으로 서술됨으로써, 그는 누르하치의 육대조이자 일란 할라가 원 거주지였던 실존 인물인 몽케 테무르(猛哥帖木兒. 滿洲實錄Mentemu)와 공간적으로 연결되었으며 그의 직계 조상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문헌에서 장백산은 아직 등장하지 않는다.
 
   부쿠리 용숀의 탄생지인 부쿠리 에 장백산이 첨입되어 결합하는 최초의 기록은 崇德 원년(1636)에 편찬되고 여러 번의 改修를 거쳐 순치 12(1655)定本이 완성된 太祖武皇帝實錄이다. 이 책의 권1 첫머리에서는 겅기연 한의 훌륭히 행한 규범에 기록된 부쿠리 용숀의 탄생 신화와 그의 일란 할라로의 이동과 몽케 테무르로의 계보 연결을 그대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太祖武皇帝實錄겅기연 한의 훌륭히 행한 규범의 서술과는 달리, 부쿠리 용숀의 탄생 신화 앞에서 장백산의 지리적 배경을 서술하고, 그에 뒤이은 滿洲源流단락에서 부쿠리 용숀의 탄생지인 부쿠리 산을 서술하면서 그 위치를 설명하는 지리적 기준점으로 장백산을 삽입했다.
 
   武皇帝實錄 1
   장백산은 높이 200 , 둘레 1,000 이다. 이 산의 정상에 호수 하나가 있는데, 이름은 타문이고, 둘레는 약 80 이다. 얄루· 훈퉁· 아이후 세 강이 모두 이 산에서 나온다. 얄루강은 산의 남쪽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흘러서 요동 남쪽의 바다로 들어간다. 훈퉁강은 산의 북쪽에서 나와서 북으로 흘러서 북쪽 바다로 들어간다. 아이후강은 동쪽으로 흘러서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 이 세 강에서 각기 珠寶가 난다. 장백산은 산이 높고 땅이 차가우며 바람이 심하고 그치지 않기 때문에 여름에 주위 산의 짐승들이 모두 이 산에서 쉰다. 이 산은 浮石이 가득 있고 東北名山이다.
   ○만주()의 연원과 흐름
   만주족은 장백산의 동북쪽 부쿠리 산 아래 호수에서 기원했는데, 그 호수의 이름은 불후리이다.....

   앞의 인용문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장백산은 부쿠리 산의 방향을 알려주는 지표일 뿐 부쿠리 용숀과 연결될 수 있는 근거와 개연성이 전혀 없다. 그전 홍타이지 재위기부터 청(후금)은 후르카의 위치를 언급할 때 장백산을 방위의 기준으로서 습관적으로 사용해왔기 때문에, 그러한 언어 습관이 부쿠리 산을 언급하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났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기록에서 장백산은 단순히 부쿠리 산의 방위를 표시하는 지표로 쓰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기록의 첫부분이 장백산으로 시작되었고 그 서술에 상당한 지면이 할애되었다. 이 기록은 장백산의 지리적 배경과 신비스러움에 대해 상세한 수치를 거론하며 자세히 서술한 후, 그 바로 뒷 단락에서는 장백산으로부터 무려 1km 이상 떨어진 곳에 있는 부쿠리 산과 불후리 호수를 단순히 장백산의 동북쪽에 있다고 서술함으로써, 장백산을 부각시키고 장백산과 부쿠리 산의 거리감을 의도적으로 희석시켰다. 결국 멀리 흑룡강 연안의 부쿠리 산의 불후리 호수에서 태어난 부쿠리 용숀이 마치 장백산 인근에서 태어난 것처럼 묘사되었고, ‘부쿠리 산불후리 호수를 기록에서 삭제하지 않으면서도 장백산과 부쿠리 용숀과 아이신 기오로 씨족이 결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결합은 서술과 단락 편집의 힘에 의해 의도적인 모호함을 유발하여 독자의 오독을 유도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지, 장백산 자체를 청 황실이나 만주족의 발상지라고 규정한 것은 아니었다.
 
   장백산을 조상의 발상지라고 확고하게 규정한 서술은 강희 21(1682)부터 편찬을 시작하여 강희 25(1686) 2월에 완성된 太祖高皇帝實錄에서 보인다. 전체 10권으로 구성된 태조고황제실록의 첫머리는 先世는 장백산에서 發祥했다는 선언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先世는 장백산에서 發祥했다. 이 산은 높이 200 , 둘레 1,000 이고, 나무가 지극히 높아서 웅장하며 상서로운 靈氣가 모여있다. 산의 정상에 호수가 있는데 타문이라고 부르며, 둘레는 약 80 이고 근원이 깊고 흐름이 넓어 얄루· 훈퉁· 아이후 세 강의 물이 여기에서 나온다. 얄루강은 산의 남쪽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흘러서 요동 남쪽 바다로 들어간다. 훈퉁강은 산의 북쪽에서 나와서 북쪽 바다로 들어간다. 아이후강은 동쪽으로 흘러서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 세 강은 기이한 물산을 품고 길러서 그곳에서 나는 진주는 세상의 보물이다. 그 산은 바람이 심하고 기운이 차가우며 奇木靈藥이 철에 따라 크게 자란다. 매년 여름에 주위 산의 짐승들이 모두 이 산에서 쉰다. 산의 동쪽에는 부쿠리 산이 있고, 산 아래에는 연못이 있는데 불후리라고 한다....
 
   인용문에서 보이듯이 태조고황제실록은 첫머리 부분에서 태조무황제실록의 서술과는 달리 장백산을 조상의 발상지라고 확실하게 규정했다. 또한 이 기록은 태조무황제실록의 서술과는 달리 장백산의 지리적 배경과 부쿠리 용숀 탄생 신화라는 두 개의 상이한 사실을 하나의 단락 안에서 하나의 사실처럼 자연스럽게 결합시키고 있다. 결국 이 기록에서 부쿠리 산은 수많은 산으로 이루어진 장백산 山群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그곳에서 태어난 부쿠리 용숀은 곧 장백산에서 태어난 것이 되었다. 이로써 장백산과 부쿠리 산과 부쿠리 용숀 삼자가 완벽하게 결합했다. 후르카인 묵시커가 부쿠리 용숀 신화를 보고한지 50년이 걸려서 청 황실 조상의 장백산 기원 역사 만들기가 태조고황제실록에서 완성된 것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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